한풍고요적군(사부카제고요세키군)

1.개요

한풍고요적군(사부카제고요세키군)는 다음 같은 유적입니다.

  • 7세기의 아스카 시대를 중심으로 한 약 100년간 스에기가 구워지고 있었습니다.
  • 구운 스에기는 나라의 수도에 세금으로 납입되었습니다.
  • 5기의 가마나 공방으로 보인다 견혈 유구, 더 스에기를 만드는 집단의 정리 역이 묻혔다고 보여진다 고분 1기 등이 나왔습니다
  • 발견된 특별한 장소에서만 사용되지 않는 일부 수혜기에서 국가의 영향이 있었던 중요한 가마라고 생각됩니다.
  • 학문 사상 높은 가치가 있다고 인정 받아 쇼와 61년(1986)에 국가 사적에 지정되었습니다.

세토우치 시와 비젠 시에는 고분 시대 후반부터 헤이안 시대 말(약 1450년 전부터 1000년 전)까지 약 450년간에 약 130기의 스에기를 태운 가마가 있으며 이를 "오크 고요 자국 군"이라고 부릅니다. 이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한풍고요적군(사부카제고요세키군)“

邑久古窯跡群・備前焼窯跡分布図

2.스에기라는 도자기입니다.

가마에서 구워지고 있던 것은 파랑 회색의 스에기라는 도자기입니다. 다양한 종류의 그릇 등을 굽고 있었지만 특히 많이 구워지고 있던 것은 음식이나 제물을 담는 "컵(杯)", 물이나 술 등의 액체나 쌀이나 과실 등의 고형물을 저축하는 "독(甕)"입니다. 이 의외로는 "고배(高杯)", "하소우", "편병(平瓶)", "명(皿)", "반(盤)", "장경호(長頸壺)", " 단경호(短頸壺)", "발(鉢)" 등이 구워졌습니다. 특히 진기한 것이 도자기의 관인 "도관", 사원의 지붕에 장식되는 "치미", 관공서 등 글자를 쓰는 곳에서 사용되는 "벼루"등이 구워지고 있었습니다. 한풍고요적군(사부카제고요세키군)의 "도관" 뚜껑이 집의 지붕 같은 모양으로 되고 있고 대부분이 오카야마 현 남부의 고분에서 사용된 지역 색이 강한 것입니다. "치미"는 오카야마시나 오사카부의 절에서 비슷한 지느러미의 모양이 있는 것이 나왔습니다.
또 스에기의 표면에 글자를 새긴 것이 있습니다." 대□"(□는 가죽?)나 "위"등 있지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스에기는 고분 시대 중반(약 1,600년 전) 조선반도에서 일본에 온 도래인 기술자에 의한 알려진 도자기입니다. 지금까지의 죠몬 토기부터 이어지는 야요이식 토기나 하제기 등에서는 없던 새로운 기술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제1에 로쿠로의 사용입니다. 로쿠로를 사용함으로써 효율적이고 크기가 반듯한 그릇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2에 가마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가마를 사용하여 1,000도 이상의 고온으로 소키체메룰 수 있어 누수가 적고 딱딱한 도자기를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에기가 파랑 회색을 하는 것은 굽는 마지막에 가마를 가로막기 때문에 산소 부족으로 점토에 포함되는 산화철을 환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환원 불꽃 소성"을 이용한 스에기는 화학 반응을 교묘히 조작하는 "고대의 첨단 기술 제품"이라고 합니다.
또 스에기에 녹색 유약이 걸린 듯 보이는 것은 장작 탄 재가 스에기에 걸려서 녹아 자연스럽게 생긴 것입니다.

屋根の名称 寒風古窯跡群出土の特殊な遺物 寒風1号窯跡群灰原出土須恵器

3.가마의 상세

고요 자국 군의 가마는 "아나가마"라고 불리는 산 비탈을 터널 모양으로 도려내다, 구멍의 내부에 점토를 붙인 것입니다.
가마는 장작을 넣는"아궁이", 장작을 태운"연소부"와 스에기를 둔"연소부", 그리고 연기를 내뿜었다"연도"로 되어 있습니다. 또 아궁이의 비탈 아래에는 구워서 있을 때 깨지거나 변형한 스에기와 가마에서 긁어낸재가 버려진 "하이바라"이 일고 있습니다.
한풍고요적군(사부카제고요세키군)의 가마의 천장이나 바닥에는 점토가 붙어 있고 보수한 흔적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또 가마가 땅 밑 깊은 곳에 있는 땅 위에 가마가 보이지 않는 지하식이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須恵器窯の模式図

4.가마군의 성립

가마를 쌓는 조건은 도자기의 토대가 되는 "흙"(점토)이 있는 것, 그리고 가마를 때는 장작이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한풍고요적군(사부카제고요세키군)이 있는 곳은 지금도 찰흙이 나는 산이 주위에 있어서 장작도 풍부한 것입니다. 그러나 흙과 장작은 사용하면 몇 년 몇 십년인가 하면 없어집니다. 오크 고요 흔적들이 세토우치 시와 비젠 시 넓은 범위에 가마를 이동하고 쌓는 것은 이 때문이에요. 그럼, 왜 한풍고요적군(사부카제고요세키군)은 100년간이나 오랫동안 가마가 있었을까요...
그것은 한풍고요적군(사부카제고요세키군)이 생긴 스에기를 꺼내는데 편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찬바람 고요 자국 군에서 남쪽 계곡을 1㎞나 가지 않는 곳에 당시 바다였다 킨카이 만이 있고 거기서 구운 스에기를 배에 태우면 세토 내해를 통해서 나라의 수도로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1-寒風古窯跡群空中写真(西上空から)

5.가마군의 변천

찬바람 고요 자국 군에서 스에기를 태우고 없다면 가마는 북쪽으로 이동하고 나라 시대에는 사야마(비젠 시), 헤이안 시대 전반에는 흐크타니(세토우치 시), 헤이안 시대 후반에는 이소 가미(세토우치 시)에 생산의 중심이 이동합니다. 그리고, 헤이안 시대 말에는 이베(비젠 시)에 크게 이동하는 생산지를 집중시키고 이 단계에서 인베 야키로 불리는 비전소의 생산이 시작됐다고 보여집니다. 이 때문에, 찬바람 고요 자국 군을 포함한 오크 고요 자국 군 스에기는 비전소의 근원으로 합니다.
현재 비전소의 이미지는 갈색입니다만, 갈색의 작품으로 완성하는 것은 가마쿠라 시대 후반 종말 때부터이며 생산 개시 당시 비전소는 스에기와 같은 회색 소키상가리이었습니다. 비전소는 스에기에서 연결된 도자기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6.출토품의 동정

과학의 힘과 특징에서 출토품은 어느 정도 산지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찬바람 고요 나중에 탔을 때 수도로 옮겨진 스에기의 큰 산지는 토읍산(오사카 부), 오와리산(아이치 현), 미노산(기후현)등이 있었습니다. 스에기를 잘 관찰하면 찬바람 고요 자국 군 것은 토읍 것보다 하얀 색을 가지고 있으며 미노와 비교하면 검은 알(운모)가 들어가량 등이 다른 것으로 나타납니다. 또 과학의 힘을 쓰고 스에기의 흙의 성분을 보면 차이가 나타나고, 어디서 태우고 스에기인지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찬바람 고요 자국 군에서 구웠다고 특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과학의 힘을 가지고 오크 고요 자국 군 중의 가마는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찬바람 고요 자국 군에서 발견된 스에기와 똑같은 모양과 특징이 없다고 모르겠습니다.
찬바람 고요 자국 군에서 구워진 스에기는 정중한 구조에서 뽀얀 색으로 자연의 녹색 유약이 흐른 아름다운 것입니다. 꼭 도에서도 인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1-Ⅲ号窯跡上層土壙大甕出土状況

7.가마군의 발견에 대해서

발견한 것은 때 실묵 물(본명:카즈 이치)라는 사람입니다.
묵수 씨는 메이지 29년(1896)4월 29일 현지 나가하마 촌(현:세토우치 시 우시 마도 쵸 나가하마)에 태어났습니다. 쇼와 2년(1927)에 찬바람에 스에기를 채집한 것에서 토기에 관심을 갖고 공부해서 지식을 높이고 오크 고요 자국 군 등을 찾아다니기 시작해서 토기 등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 성과를 고고학 전문 기관지 『 기비 고고 』에 발표를 하거나 스스로 자료 도록 『 오쿠노 카마 아토 』(전 5권)의 출판을 했습니다. 묵수 씨가 모은 "시실 컬렉션"으로 불리는 자료에는 출토된 지번·깊이·발견 연월일 등이 제대로 먹으로 쓰고 자료의 학술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묵수 씨는, 헤세이 5년 6월 13일 향년 96세로 돌아가셨어요. 찬바람 도예 회관의 안뜰에는 묵수 씨의 공적을 기려 오랜 노력에 감사의 마음을 담은 비전소의 스에 상이 세워졌습니다. 현재 찬바람 고요 흔적들이 국가 지정 사적이란 가치를 인정을 받아 간직된 것은 묵수 씨의 노력에 의한 것입니다.

時實黙水氏(1896 - 1993)